4·3 토벌 지휘자 박진경이 유공자라니…분노하는 제주
페이지 정보

본문
1948년 5월6일 미군정에 의해 새로 발탁된 군 현장 책임자는 토벌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40여일 만인 6월18일 박진경을 암살한 부하 중 한명인 손선호 하사는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 명령”을 암살 동기로 밝히기도 했다. 실제 1948년 6월 미군 정보 보고서는 “5천여명이 체포됐다”고 당시를 기록했다.
4·3당시 무장대와 주민을 학살한 본격적인 강경 진압은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면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내린 1948년 10월17일부터 전개됐지만, 그 시작에 있는 인물이 박진경인 셈이다. 이후 박진경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지만, 1952년 군경원호회가 주도해 세운 그의 추도비는 장소를 바꿔가며 아직도 제주에 남아 도민사회에 갈등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징성 덕분에 박진경은 극우세력이 영웅으로 받드는 인물 중 한명이 되기도 했다. 지난 10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관람해 논란이 된 영화 ‘건국전쟁2’에서 박진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무장세력과 싸우다 죽임당포천출장샵한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영화 개봉을 계기로 제주에선 그의 사진과 함께 ‘4·3은 공산당 폭동으로 발생’이라고 적힌 펼침막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내걸려 왔다. 그때마다 분노한 유족과 도민들은 박진경을 앞세워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고 요구해왔다. 이런 고통에 공감해 이재명 대통령도 이날 박진경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를 검토하라고 국가보훈부에 지시한 것으로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인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은 “40일 남짓 연대장을 한 박진경이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면서도 “강경 진압작전을 처음 채택해서 무리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4·3을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책동’으로 왜곡해서 보는 이들은 박진경이 4·3을 진압하려고 했던 영웅으로 본다”며 “(그가) 남로당의 책동을 막는 과정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식의 해석은 아주 비양심적이고, (여기에) 유족과 도민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4·3당시 무장대와 주민을 학살한 본격적인 강경 진압은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면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내린 1948년 10월17일부터 전개됐지만, 그 시작에 있는 인물이 박진경인 셈이다. 이후 박진경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지만, 1952년 군경원호회가 주도해 세운 그의 추도비는 장소를 바꿔가며 아직도 제주에 남아 도민사회에 갈등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징성 덕분에 박진경은 극우세력이 영웅으로 받드는 인물 중 한명이 되기도 했다. 지난 10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관람해 논란이 된 영화 ‘건국전쟁2’에서 박진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무장세력과 싸우다 죽임당포천출장샵한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영화 개봉을 계기로 제주에선 그의 사진과 함께 ‘4·3은 공산당 폭동으로 발생’이라고 적힌 펼침막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내걸려 왔다. 그때마다 분노한 유족과 도민들은 박진경을 앞세워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고 요구해왔다. 이런 고통에 공감해 이재명 대통령도 이날 박진경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를 검토하라고 국가보훈부에 지시한 것으로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인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은 “40일 남짓 연대장을 한 박진경이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면서도 “강경 진압작전을 처음 채택해서 무리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4·3을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책동’으로 왜곡해서 보는 이들은 박진경이 4·3을 진압하려고 했던 영웅으로 본다”며 “(그가) 남로당의 책동을 막는 과정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식의 해석은 아주 비양심적이고, (여기에) 유족과 도민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관련링크
- 이전글구글찌라시 [ adbada.com ] 통해 정보의 바다에 뛰어들어보세요. 25.12.15
- 다음글토토사이트 【위너보증.com / 가입코드 9122】 안전놀이터 손쉽고 빠른 안전한 결제 시스템으로 고민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25.12.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